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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박열> 줄거리 및 역사적 배경, 느낀 점

by 오뜰로뜨 2025. 3. 1.

영화 &lt;박열&gt; 포스터
영화 <박열> 포스터

 

3·1절을 기념해 최근 문경시 마성면에 위치한 '박열의사기념관'에 단체 관람객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2025년 올해가 광복 80주년, 한일 수교 60주년으로 의미 있는 한 해인 만큼 독립운동의 영웅들이 더욱 관심을 받는 듯하다. 2017년 6월 28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그 영웅 중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이다.

 

영화 '박열' 줄거리

박열은 문경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인력거 일을 하며 지낸다. 그리고 아나키즘 무정부주의 사상 전파를 위해 흑도회를 만들고 잡지에 일본 정부에 저항하는 시를 투고한다. 그의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감동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찾아와 함께 동거하며 뜻을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박열과 후미코는 동지 서약을 맺고 함께 지내게 된다. 그들의 서약은 동지로서 동거하며 활동 중에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 어느 쪽이든 타락한다면 그만두기로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박살단이라는 불령선인들로 구성된 단체에서 활동한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평등사회를 희망하며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 또한 박열은 일본 황태자 암살을 위해 의열단과 접선해 폭탄을 반입하려고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에 의해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1923년 규모 7.0의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건물들 또한 무너져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은 모든 책임을 조선인에게 돌리려고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니고 우물에 독을 타 사람들을 해한다는 괴소문을 퍼뜨린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약 6000명의 죄 없는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이 사건이 커지고 문제가 되자 이를 가리기 위해 일본 내각은 대역죄 사건을 또 다른 화젯거리로 삼고 박열을 그 배후로 정한다.

그러나 박열은 이러한 일본 내각의 꾀를 꿰뚫어 보고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한다. 박열은 연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재판에 나가 자신들의 뜻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동경 감옥에 수감된 박열은 계획대로 모두 자백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보통 억울함을 호소하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당당한 그와 가네코 후미코의 태도에 당황한다.

재판을 앞두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일본 교도소에 요구한다. 그리고 최후 공판 전 박열과 후미코는 수감 중에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다. 박열은 한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 조선말 통역관 배치, 선언문의 직접 낭독, 재판관과 같은 높이의 자리에 앉는 것 등 재판에 나가기 전 몇 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일본은 그 중 한복을 입는 것과 박열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두 가지 요구만 받아들인다.

박열과 후미코는 재판장에서도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스러운 행위를 알린다. 또한 그들은 재판에서 일본 식민 정책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비난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다. 박열과 후미코의 이러한 행실은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끌며 일본을 소란스럽게 한다. 결국 최후 공판에서 박열과 후미코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 하지만 여론이 들끓자, 일본 정부는 이들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변경한다. 수감되어 있던 중 후미코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박열은 애통하지만,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22년 2개월을 지내고 결국 석방된다.

 

'박열'의 역사적 배경

영화 박열은 관동대지진, 관동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1923년 9월 1일에 일본 간토 지방 일대에 7.0 규모의 대지진이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이후에도 이어진 강력한 여진과 화재 등으로 대규모의 피해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혼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에 일본인들의 불만과 불안을 완화 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가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자경단을 조직하라고 지시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지시에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들에게 반감이 있던 일본인들은 가혹하게 집단학살을 행한다. 무고한 조선인을 수천 명 학살한 일본인들의 가혹 행위는 일본의 역사적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박열'의 감상 후기

영화 '박열'은 평론가, 대중들에게 수작에서 평작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이야기의 깊이가 깊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래서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심오한 내용임에도 중간중간 나왔던 희화적 내용들이 주인공들을 친근하게 느껴지게 하고 내용에 더 집중하게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관계와 호흡이 너무 좋아서 그들의 비극적 결말을 아는데도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일본의 만행으로 한국이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를 떠올리며 분노와 슬픔이 마음속에 일기도 했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까지 본 뒤에도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던 것 같다.

'박열'은 영화의 시작점에 '철저한 고증의 실화입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한국의 뼈아픈 역사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외에도 일본의 식민 통치 속에서 자유를 외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한국이 있기에 그 뜻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 통치 국가들과 희생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